커플 11,196쌍의 응답을 기계에 넣고 물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맞혀 보라고. 기계가 가장 잘 맞힌 항목은 상대의 나이도, 소득도, 성격도, 애착 유형도 아니었다. '상대가 이 관계에 헌신하고 있다고 내가 느끼는 정도'였다. 조건표 맨 윗줄에 올려 두던 것들은 대부분 그 아래로 내려갔다. ▷ 지금까지 가장 큰 커플 데이터 · 43개 합쳐서 분석한 종단 커플 연구 서로 다른 연구팀의 자료 · 11,196쌍 분석 대상 커플 자기보고 응답 · 2020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 게재 조엘·이스트윅 연구팀 (사진) 조건표는 길고, 실제로 맞히는 칸은 몇 개 안 된다. ■ ① 상대의 조건보다, 관계의 체감 서맨사 조엘과 폴 이스트윅을 비롯한 연구진이 2020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실은 분석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개별 연구들은 표본이 작아 저마다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그래서 43개 종단 연구의 자료를 한데 모으고, 어떤 변수가 관계 만족을 실제로 예측하는지 기계학습으로 비교했다. 상위에 올라온 것들은 성격이 아니라 지각이었다. 상대가 이 관계에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 고마움, 성적 만족, 상대도 만족하고 있다는 지각, 그리고 갈등의 양. 하나같이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이 관계가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에 관한 항목이다. 이 목록에는 실용적인 함의가 하나 들어 있다. 관계 만족은 상대를 고를 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고른 다음에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영역에 훨씬 크게 걸려 있다는 것이다. ▷ 관계 만족을 잘 예측한 항목들 · 헌신 지각 상대가 이 관계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느낌 · 고마움 상대에게 고맙다고 느끼는 정도 · 성적 만족 둘 사이의 만족감 · 상대 만족 지각 상대도 만족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 갈등 갈등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크게 있는가 자료: Joel·Eastwick 연구팀, 2020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 다섯 칸 모두 상대의 스펙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내 지각'에 해당한다. (사진) 헌신은 말이 아니라 일정에서 드러난다. ■ ② 상대에게 직접 물어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따로 있다. 분석에는 커플 양쪽의 응답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래서 '상대가 스스로 보고한 자기 특성'이 내 만족을 얼마나 더 설명해 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겸손하게 나왔다. 내 쪽의 관계 지각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가 직접 답한 성격이나 성향 정보는 추가로 보태 주는 몫이 크지 않았다. 내가 이 관계를 어떻게 체감하는지가 이미 상당 부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한쪽으로는, 상대의 프로필을 아무리 정밀하게 파악해도 관계의 미래는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경고다. 다른 쪽으로는, 지금 내 안에서 울리는 신호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예측력이 약했던 것 / 강했던 것 자료: Joel·Eastwick 연구팀, 2020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 왼쪽은 만나기 전에 확인하는 칸이고, 오른쪽은 만난 다음에 두 사람이 만드는 칸이다. (사진) 예측력은 조건표가 아니라 체감 쪽에 몰려 있었다. [✔ 솔직한 체크포인트] 이 연구가 '조건은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분석 대상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커플들의 자기보고였다. 애초에 만나지 않았을 조합, 만나기 전에 걸러진 조건들은 데이터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 관계 지각과 만족은 서로를 밀어 올리는 관계라, 어느 쪽이 원인인지 이 분석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다. 이 정도 규모의 데이터에서도 상대의 스펙은 관계 만족을 잘 맞히지 못했다. 조건표를 다듬는 데 쓰는 시간을 관계의 체감을 챙기는 쪽으로 옮길 근거로는 충분하다. (사진) 확인할 것은 조건표가 아니라, 요즘 이 관계가 어떻게 느껴지는가다. 연휴에는 조건표가 유난히 자주 펼쳐진다. 나이, 직장, 집, 양가 사정. 대화가 그쪽으로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43개 연구와 11,196쌍이 알려 준 것은 그 표 바깥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로 줄어든다. 요즘, 이 관계가 어떻게 느껴져? ■ 한 줄 정리 이 연구를 실생활로 옮기면 할 일이 딱 두 줄로 줄어든다.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상대가 이 관계에 헌신하고 있다는 신호를 서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리고 고마움을 속으로만 두지 않는 것. 헌신 신호는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일정에서 드러난다. 다음 달 계획에 상대가 들어 있는가, 주말 약속을 잡을 때 상대에게 먼저 묻는가, 친구나 가족에게 두 사람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상대는 마음 속을 볼 수 없고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조각으로만 헌신을 추정한다. 마음이 있어도 조각이 안 보이면 상대의 계기판에는 잡히지 않는다. 고마움은 구체적일수록 힘이 세다. '고마워'보다 '어제 내가 늦게 들어왔는데 불 켜 놓고 기다려 준 거, 그거 생각보다 크게 남았어'가 훨씬 정확하게 전달된다.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지 지목해야 상대가 그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연구가 덜어 주는 짐도 있다. 상대의 성격 유형이나 애착 유형을 완벽하게 진단해 낸다고 해서 관계의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연휴에 양가 어른들이 조건표를 펼쳐 놓고 이야기를 이어 가더라도, 그 표에 적힌 항목들은 이 데이터에서 예측력이 약했던 쪽에 가깝다. 두 사람이 확인해야 할 것은 조건표가 아니라 '요즘 이 관계가 어떻게 느껴지는가'다. ■ 출처 · 43개 종단 커플 연구의 기계학습 분석(미국 국립과학원회보) — Joel, Eastwick et al.,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