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은 10분짜리 전화 통화였다. 남성 참가자에게는 대화 상대의 사진이라며 사진 한 장을 미리 보여 줬는데, 그 사진은 실제 상대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매력적인 사진'을 본 남성과 통화한 여성은, 여성 쪽 목소리만 따로 들은 관찰자들의 평가에서도 더 밝고 호감 가게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1977년 실험이다. 소개팅에 '별로일 것 같은데' 하고 나가면 그 예상은 대체로 맞는다. 상대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 예상이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뀐 건 듣는 쪽이 아니라 거는 쪽의 태도였다. ■ ① 기대는 태도로, 태도는 상대의 말투로 마크 스나이더와 엘리자베스 탱키, 엘런 버샤이드가 설계한 실험의 구조는 이랬다. 남녀 대학생을 짝지어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전화 대화를 하게 했다. 남성에게만 '상대의 사진'이라며 사진을 줬고, 그 사진의 매력도는 실험자가 임의로 배정했다. 여성은 자기 사진이 오갔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결과는 두 단계로 나타났다. 먼저 남성의 태도가 달라졌다. 상대를 매력적이라고 믿은 쪽은 더 따뜻하고 사교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다음 여성의 말투가 달라졌다. 따뜻한 태도를 받은 여성은 실제로 더 활기차게 대화했고, 통화 녹음에서 여성 목소리만 따로 들은 제3의 관찰자들 — 사진도 조건도 모르는 사람들 — 도 그렇게 평가했다. 연구팀은 이 현상을 '행동확증'이라고 불렀다. 믿음이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상대의 행동을 만들고, 그 행동이 원래의 믿음을 증거로 되돌려 준다. ▷ 자기충족 예언이 한 바퀴 도는 네 칸 · ① 기대 사진·프로필·주선자의 한마디로 결론이 선다 · ② 내 태도 질문이 짧아지고 리액션이 줄어든다 · ③ 상대의 반응 뻣뻣해지고 말수가 준다 · ④ 확신 '역시 별로였다'가 증거로 남는다 네 번째 칸이 다시 첫 번째 칸으로 들어간다. 이 고리는 상대가 아니라 ②에서만 끊을 수 있다. (사진) 같은 고리가 교실에서도 돌았다. ■ ② 소개팅 자리에 그대로 옮겨 붙는다 로버트 로젠탈과 리노어 제이컵슨이 1968년 교실에서 확인한 것도 같은 고리였다. 교사에게 '이 학생들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알려 줬을 뿐인데 — 그 명단은 무작위였다 — 해당 학생들의 성취가 실제로 달라졌다. 바뀐 것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가 그 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도 다르지 않다. 프로필 사진, 나이, 직장, 주선자가 흘린 한마디로 앉기 전에 결론이 서면, 자리에 앉은 뒤의 내 행동이 그 결론을 향해 정렬된다. 질문이 '네/아니오'로 끝나는 형태로 바뀌고,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가 줄고, 휴대폰을 한 번 더 본다. 상대는 그 변화를 놀랄 만큼 정확하게 읽는다. 그리고 그에 맞춰 말수를 줄인다. 한 시간 뒤 내가 얻는 결론은 '역시 별로였다'이지만, 그 결론의 절반은 내가 만든 것이다. ▷ 같은 사람, 다른 결과 — 앉는 순간의 프레임 차이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는 상대가 아니라 내 쪽 행동 목록이다. 상대는 그 목록에 반응할 뿐이다. (사진) 테이블 위 휴대폰의 위치가 태도를 말해 준다. [✔ 솔직한 체크포인트] 이 원리를 '무조건 좋게 기대하라'로 읽으면 곤란하다. 긍정적 기대가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보장은 없고, 억지로 띄운 기대는 만남 뒤의 실망만 키운다. 실험이 알려 주는 건 그보다 좁고 실용적이다. 판단은 대화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 그리고 대화 도중의 내 행동이 이미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것. 하나 더 덧붙이면, 이 고리는 상대 쪽에서도 똑같이 돈다. 오늘 만난 사람이 유독 뻣뻣했다면 그 사람도 앉기 전에 무언가를 보고 왔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 번째 만남을 제안할 여지가 조금 넓어진다. (사진) 결론은 나갈 때 내린다. 앉기 전에 말고. 1977년의 그 통화는 10분이었다. 태도가 상대의 말투를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이 그 정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개팅 자리에서 흔히 쓰는 '첫 3분이면 안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3분 만에 결론이 서는 건 사실이지만, 그 결론이 맞는지는 그 뒤 한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달려 있다. 다음 자리에서는 20분만 판단을 미뤄 보자. 열린 질문 몇 개면 충분하다. 어차피 결론은 나오면서 내려도 된다. ■ 한 줄 정리 판단을 늦추라는 조언은 실천하기 어렵다. 사람은 몇 초 만에 결론을 내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방식으로는 잘 안 된다. 대신 행동 한 가지를 정해 두는 편이 낫다. 자리에 앉고 나서 20분 동안은 '왜'와 '어떻게'로 시작하는 질문만 쓰는 것이다. '주말에 뭐 하세요'는 닫힌 질문이고, '그거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는 열린 질문이다. 이 규칙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질문의 품질 때문이 아니라, 열린 질문을 쓰려면 상대 말을 실제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듣는 동안에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두 번째 장치는 리액션의 크기다. 이미 마음속으로 접은 상대에게는 리액션이 자동으로 줄어드는데, 상대는 그 변화를 정확히 감지한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를 줄이지 않기'처럼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붙잡는 게 낫다. 세 번째는 시간이다. 사전 정보로 이미 결론이 났다고 느껴지면, 그 자리를 30분 만에 끝내는 대신 정해진 시간만큼은 채운다. 1977년 실험의 통화 시간은 10분이었다. 태도가 상대의 말투를 바꾸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반대로도 돈다는 걸 기억해 둘 것.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의 태도가 뻣뻣하다면, 그중 일부는 내가 만든 것일 수 있다. ■ 출처 · Mark Snyder, Elizabeth D. Tanke & Ellen Berscheid, 「Social perception and interpersonal behavior: On the self-fulfilling nature of social stereotyp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977) · Robert Rosenthal & Lenore Jacobson, 「Pygmalion in the Classroom」 (1968)